마인드

“설국” – 눈과 사랑, 그리고 덧없는 아름다움의 이야기

욱’s 2025. 3. 2. 05:10

일본 문학의 거장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은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고요하고 섬세한 문체로 그려진 작품이다. 이 소설은 “일본 문학이란 이런 것이다”라는 걸 보여주듯, 풍경과 감정을 교묘하게 엮어 눈처럼 덧없는 사랑과 인생을 묘사한다. 하지만 단순히 감상적인 사랑 이야기라고 보기엔 너무 깊다. 《설국》에는 전통과 근대, 환상과 현실, 그리고 인간의 내면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렇다면, 이 아름다운 소설을 몇 가지 흥미로운 주제로 나누어 들여다보자.

1. 눈과 설국 – 배경이 곧 주인공?

이 소설의 첫 문장은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이 짧고도 강렬한 문장은 독자를 단숨에 설국(雪国, 눈의 나라) 으로 데려간다.

설국은 어디일까?
가와바타가 작품 속에서 묘사한 설국은 일본 니가타현의 에치고 유자와(越後湯沢) 지역을 모델로 한 곳이다. 겨울이 되면 눈이 몇 미터씩 쌓이고, 사람들은 깊은 산속 온천 마을에서 조용히 살아간다.

그런데 이 설국의 묘사가 단순한 풍경이 아니다.
눈은 차갑고 깨끗하지만, 동시에 고립된 세계를 상징한다. 그리고 이 하얀 세계 속에서 인간의 감정은 더욱 도드라진다. 주인공 시마무라가 찾는 것은 눈처럼 순수한 아름다움이지만, 그는 그것을 끝까지 잡지 못한다. 눈이 녹아 사라지듯이, 그의 사랑도 덧없이 흩어진다.

2. 시마무라와 고마코 – 비현실적인 사랑

이야기의 중심에는 도쿄에서 온 시마무라와 설국의 게이샤 고마코가 있다.
• 시마무라: 유유자적한 인생을 사는 도쿄의 부유한 남자. 일은 하지 않고 유럽 무용을 연구하는 것이 취미다. 하지만 실제로는 제대로 공부하지도 않는다. 현실과 거리를 둔 채, 아름다운 것만을 탐닉한다.
• 고마코: 설국에서 살아가는 젊은 게이샤. 술과 유흥을 즐기는 일반적인 게이샤와 달리, 정직하고 순수하며 감정이 매우 강렬하다. 그녀는 시마무라를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그 사랑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고마코는 처음에는 시마무라를 경계하지만, 점점 그에게 마음을 연다. 그녀는 **“나는 당신을 너무 좋아해요. 어쩌면 좋죠?”**라고 말하며, 깊은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하지만 시마무라는? 그는 그녀에게 끌리면서도,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볼 뿐이다.

이 관계에서 사랑을 진정으로 원하는 쪽은 고마코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시마무라는 사랑을 감상하는 데만 그친다. 그는 그녀를 소유하려 하지 않고, 그저 순간의 아름다움을 즐긴다. 이것이 이 소설의 가장 애틋한 점이다.

3. 요코 – 환상의 존재

소설 속에는 또 한 명의 중요한 인물, 요코가 있다.

요코는 고마코와 달리 신비롭고 조용한 여성으로 등장한다. 그녀는 병든 남자를 간호하며 헌신적인 삶을 살고, 시마무라는 그녀에게 강하게 끌린다.

하지만 그녀는 마치 환상처럼 존재한다. 시마무라는 그녀를 멀리서 바라볼 뿐, 깊이 다가가지 않는다. 요코는 시마무라가 완전히 손에 넣을 수 없는 또 다른 이상적인 아름다움이다.

흥미로운 점은, 시마무라가 처음으로 요코를 보았을 때 유리창에 반사된 모습이었다는 것. 이는 그녀가 현실과 동떨어진 존재임을 암시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는 불길 속에서 쓰러진다.

이것은 단순한 비극적 사건이 아니라, 시마무라가 쫓던 이상적인 아름다움이 사라지는 순간을 의미한다.

4. “설국”이 전하는 메시지 – 덧없는 아름다움

《설국》의 주제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덧없는 아름다움”**이다.

시마무라는 눈처럼 순수한 아름다움을 추구하지만, 그것을 붙잡을 수 없다. 고마코는 시마무라를 사랑하지만, 결국 그는 떠난다. 요코는 시마무라가 동경하지만, 끝내 사라진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이 작품을 통해 아름다움은 영원하지 않으며, 그것이 바로 아름다움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이는 일본 미학의 중요한 개념인 “모노노아와레(もののあはれ, 사물의 애상)” 와도 연결된다. 순간적으로 빛나는 아름다움, 그러나 그것이 사라질 것을 알기에 더욱 애틋한 감정. 이 감각이 《설국》을 관통하고 있다.

5. 결말 – 눈 속에 사라지는 사랑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강렬하다.

불이 난 와중에 요코가 쓰러지고, 시마무라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눈이 하늘에서 내려오고, 그는 마치 모든 것이 사라지는 듯한 감각을 느낀다.

그 순간, 그는 무엇을 깨달았을까?

그가 찾던 이상적인 아름다움은 결국 허망한 것이었음을? 고마코의 사랑을 진정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자신을?

이 소설의 결말은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설국》이 주는 가장 깊은 여운이다.

마무리 – “설국”을 읽어야 하는 이유

《설국》은 단순한 로맨스가 아니다.
이 작품은 아름다움을 탐닉하는 인간의 심리, 사랑과 현실의 괴리, 일본 전통 미학을 모두 담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 줄 한 줄이 눈처럼 섬세한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마치 한 편의 시를 감상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이 한 문장 속에 이미 모든 것이 담겨 있다.
눈처럼 아름답고, 눈처럼 덧없는 사랑.

《설국》은 읽을 때마다 새로운 의미가 보이는 작품이다.
아직 읽지 않았다면, 이번 겨울에는 꼭 한 번 펼쳐보기를 추천한다.